‘사랑의 기쁨 가정의 해’를 마무리하며
– 예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혼인의 불가해소성
손호빈 디오니시오 신부
(서울대교구)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문헌, 「사랑의 기쁨」(Amoris Laetitia) 반포 5주년을 맞아 지난 2021년 3월 19일에 ‘사랑의 기쁨 가정의 해’가 시작되었고, 2022년 6월 ‘제10차 세계가정대회’를 통해 폐막되었습니다. 교황님의 문헌, 「사랑의 기쁨」은 오늘날 많은 어려움 속에 처한 가정 공동체에 위로와 힘 그리고 희망을 전해주며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의 소명을 일깨워줍니다.
그러나 「사랑의 기쁨」을 위해 마련되었던 2015년 가정 시노드를 비롯하여 문헌이 반포된 이후 일각에서는 몇 가지 사항을 두고 가르침인 교리-엄밀히 말하자면 교의-를 사목적 배려 차원에서 예외적으로 바꿔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동성 결합과 이혼 후 재혼한 이들의 영성체였습니다. 이를 두고 적지않은 매체들은 마치 교회의 가르침인 교리와 사목이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포장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오늘날 시대에 뒤쳐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숨막히게 하는 유물처럼 취급합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향해 시대의 요청에 따라 교리를 수정하고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인 교리와 교회법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질서를 성령의 도우심과 올바른 지성과 양심으로 해석하여 정립한 것이지 교회가 필요에 의해 제정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느님의 진리를 해석하고 수호하며 시대에 맞게 그 진리를 현명한 방법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목은 교리와 대립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교리는 사목에 힘을 실어주며 모호한 상황에 분명한 기준을 제시해주고 무엇이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지 조명해주며, 우리가 살아갈 숨을 불어넣어줍니다.
왜 세상은 교회의 가르침인 교리가 인간의 마음을 숨막히게 한다고 생각할까요?
사실 ‘교리(엄밀히 말하자면 교의)’라는 단어가 오늘날 좋은 명성을 지니고 있지는 않습니다. ‘진리’라는 단어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포스트모던 시대에 이 단어는 평가절하당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말하는 것이 우리의 구체적인 역사에 대한 강요와 억압을 말하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교리는 또한 우리를 가두는 그물처럼 보여지며, 마음의 선한 움직임을 방해하고, 새로움의 지평을 걸어잠그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교리’라는 말은 매우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신앙 안에서 교리는 우리의 삶에 그리고 예수님과의 만남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과 매우 긴밀히 연결되어져 있습니다. 교리는 추상적인 선언이 아닙니다. 또한 대다수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는 고상하게 살면 좋다는 복음주의적 이상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교리는 하느님 사랑과 인간을 구원하는 그 분의 권능에 대한 역사입니다. 교리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역사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삶의 곁에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믿음의 고백은 하느님의 구원과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약속을 기억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또 그리스도교 교리는 역사의 기원과 끝을 밝혀주는 결정적 이야기인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교리 안에는 성부로부터 시작하여 성부께로 돌아가는 예수님의 위대한 사랑의 여정에 대한 기억과 희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마음을 숨막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마음을 확 트이게 해주고 충만함으로 채워줍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근원을 기억하고, 우리가 걸어갈 방향을 명확히 하며, 생동감을 갖고 그 여정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는 교리가 사목적 돌봄에 필요한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좋은 목자는 좋은 목장에서 양들과 함께 걸으며 그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돕기 때문입니다. 교리에 대한 관심은 사목적 관심입니다. 교리는 좋은 목자의 사목에 힘을 줍니다. 그래서 교리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은 사목에 관심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교리와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관계인가요?
그리스도교 교리는 인간의 역사를 관통하는 하느님의 이야기, 예수님의 이야기이며, 이는 성취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에게 주어지고 우리 발걸음을 동행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를 그 분의 수준으로 올려주며,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주고, 우리의 품위를 강화시켜 줄 만큼 훨씬 더 위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로 힘을 얻어 그 분과 함께 걸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리는 그저 예수님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교리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발걸음을 따라, 그분의 영원한 사랑과 근원적인 용서의 방법에 따라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이는 교리가 우리에게 단지 앞서 말한 복음주의적 이상, 도달할 수 없는 아름다운 이상을 전해주는 것이 아닌 이유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교리는 우리 삶 안에 복음이 육화하여 생긴 것입니다. 교리는 우리에게 ‘이렇게 사는 것이 좋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예수님의 살아있는 이야기와 함께 ‘이렇게 사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살아갑시다’하고 말합니다.
만약 교리가 이야기-우리 이야기-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면, 우리는 매우 흥미롭고 위대한 사목적 빛을 갖게 됩니다. 만약 자신들의 사랑 이야기가 계속되고, 견고한 토대를 지니고, 영원한 약속을 보증해준다고 한다면, 어떤 부부가 흥미를 갖고 알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자신의 아이가 걸어가고 성장하는 한계를 변화시켜준다고 한다면, 어떤 부모가 흥미를 갖지 않겠습니까? 교리는 이런 기억과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혼인에 관한 교리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어떻게 부부사랑을 동반하는 방법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혼인성사와 성체성사는 교리와 어떤 관계인가요?
성사들, 특히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삶이 우리를 어루만지고 우리를 당신 안에 일치시키는 터전입니다. 성사는 우리와 함께 걸으며, 당신의 박동으로 우리와 소통하는 예수님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사를 통해 ‘너희는 용서해라, 이는 나의 몸, 나의 사랑, 나의 시간이다’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성사 안에서, 모든 전례 안에서 교리는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 여정의 이야기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우리 여정의 이야기를 생생하고 명백하며 육화된 방법으로 우리에게 전달해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사로부터 교리가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사는 교리가 전해주는 신앙을 고백하는 참된 장소입니다. 교회는 그저 말로만이 아니라 세상과 사회 안에서 가시적이며, 공동체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따라서 교리는 육화된 교리이며, 우리 삶의 한 사건과 몸 그리고 시간에 연결되어져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한 유명한 금언은 이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기도하는 법이 곧 신앙의 법이다.”(lex orandi, lex credendi). 전례를 거행하는 방법이 믿음을 고백하는 방법의 근원입니다.
이혼 후 재혼한 부부의 영성체 허용과 관련하여
이혼 후 재혼한 부부에 대한 영성체 허용과 관련하여 많은 사람이 교리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사목적 배려의 문제일 뿐이라고 강조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영성체를 허용하는 것이 예외적이라 할지라도 변경할 수 없는 것을 변경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 사항에 대해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이는 교리적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교리는 성체성사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와의 만남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사항에 대해 2015년 가정 시노드에서 논의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무엇보다도 전례 거행 안에서 교회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특히, 성체성사의 중심인 영성체를 두고 성체성사를 변경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교리적 결과를 초래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체성사에 대해 말하는 것은 단순히 교리를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가 탄생한 근원을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체성사와 혼인성사 간의 일관성입니다. 교회의 생명에 있어 성체성사와 혼인성사의 일관성은 필수적입니다. 왜냐하면 성체성사는 인간의 몸, 우리의 구체적인 관계 그리고 삶의 방식을 건설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며, 혼인성사는 창조 때부터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특별하게 해주고 부부라는 특별한 관계를 통해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협력할 수 있도록 초대해주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체성사와 몸 사이에 맺고 있는 결합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는 교회의 특성을 위한 결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결합은 교회가 탄생한 근원적 샘이며, 하느님께서 교회를 통해 결실을 얻기 위해 활동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를 인간의 몸과 분리하는 것은 교회의 가르침를 추상적으로 만드는 것이며, 사회를 건설하고 삶을 빛나게 하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목적 활동을 해야 하나요?
교회의 이러한 규율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 교회의 사목에 제한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는 “아니오”가 아니라 위대한 “예”입니다. 왜냐하면 위대한 ‘예’는 하느님께서 활동하시고 교회를 통해 결실을 맺는 곳에 우리를 머물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체성사와 몸 사이의 이런 조화는 재혼한 사람들을 위한 희망의 길을 열어줍니다. 이 희망의 길이 시도드가 참된 새로움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길입니다. 이 길은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영원한 사랑과 용서와 함께 그분의 이야기를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화해의 여정입니다.
‘가정 공동체’는 우리에게 길의 출발점과 도착점을 알려줬지만, 이 두 지점 사이의 여정을 발전시키기 위한 사명과 창의성은 여전히 남겨져 있습니다. 출발점은 교회에 속해 있는 세례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환대해야하고 동반해야 합니다. 도착점은 혼인성사와 성체성사를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섹슈얼리티를 살아가는 방식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해야할 큰 과제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회복시켜 주실 수 있기 때문에, 이 두 지점 사이의 여정을, 화해의 여정을, 구체적인 표징들과 공동체의 동반과 함께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혼인의 불가해소성의 의미와 가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혼인의 불가해소성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혼인의 불가해소성이 족쇄가 아닌 은총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유동적인 관계인 우리 문화는 혼인의 불가해소성을 부담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자기중심적 개인과 시간에 대한 통제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시선인 사랑의 관점에서 불가해소성은 새로운 힘과 능력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부부에게 선물하신 서약하는 힘(나아가 서약을 지키며 살아갈 힘)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혼인은 불가해소적이다’라는 말은 우리의 이야기가, 모든 가정의 이야기가 예수님께서 ‘영원히’라고 말하는 방식과 용서를 베푸시는 방식을 따라, 대신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셨던 방식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혼인의 불가해소성은 가정에 새 시간을, 그리스도 사랑의 시간을 선물해 줍니다. ‘시간은 공간보다 위대’합니다.
‘가정 교황’이신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가르침은 가정 사목을 위해 우리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참되고 가치있는 광산입니다. 오늘날 어떤 가르침이 재발견되어야 하고, 어떻게 그것을 심화시켜야 할까요?
광산이라 말했는데,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잠재력과 미래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씨앗의 비유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성인은 교회의 미래는 가정의 길을 통해 나아간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젊은 사제였을 때, 인간적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을 배웠고, ‘사랑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위대한 사명에 헌신한 그 분의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현대 인간의 길을 따랐습니다. 그것은 경험의 길입니다. 하지만 ‘자기 지시적’(self-referential) 주체 안에 자기 자신을 가두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경험은 사랑의 경험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사랑은 인간의 길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사랑을 가르쳐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스승은 예수님이시고, 그 분은 사랑이십니다. 따라서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우리에게 세상에 동화되거나 사랑의 ‘세속주의’가 아닌 현대성과 대화하기 위한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인간의 신비를 인간에게 계시해준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출발점으로 해서 사랑의 진리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사랑의 기쁨」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처럼, 우리는 생명을 북돋아주는 사랑의 능력을 믿을 수 있습니다. 사랑의 진리는 인간을 가두고, 화해의 길을 걸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많은 형태의 ‘약한 사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또한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우리에게 가정이 홀로 있음이 좋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며 가정을 위한 환경을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오늘날 가정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고립’입니다. 우리는 가정을 사적인 실재처럼 이해합니다. 가정 교황인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우리에게 인간은 가정을 통해 태어나며, 가정 안에서 사회 또한 태어난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공동선인지 그 안에서 배우기 때문입니다. 가정 안에서 혼인성사를 통해 교회 또한 건설됩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관점에서 보면 교회는 ‘큰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교회을 세우는 일원입니다. 그리고 가정은 선교와 사명을 위한 대체불가한 자원입니다.
* 본 글은 2015년에 작성된 인터뷰 기사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https://lanuovabq.it/it/jose-granados-il-matrimonio-indissolubilee-come-vivere-il-tempo-con-gli-occhi-di-gesu